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문단 편집) === 성장기 === 1982년 비체슬라프 부투소프와 '''드미트리 우메츠키'''[* 나우틸루스 초기 멤버, 1987년에 한번, 1989년에 완전히 탈퇴했다.]가 스베틀롭스크에서 결성했다. 후에 기타리스트 [[안드레이 사드노프]]와 합류하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이라는 이름으로 데모 앨범을 녹음했다. 또 후에 드러머 [['알렉산드르 자루빈']]과 합류해 [[레드 제플린]][* 영국의 록밴드,1970년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하드 록과 헤비메탈의 대중화에 앞장섰다.]의 영향을 받아 1983년 데뷔엘범 ''''Переезд''''[* 이동,이주 등]을 발표했다. 그외에도 스베틀롭스크에서 자잘한 공연을 했다. 1984년 록그룹 우르핀 쥬스와 스베틀롭스크 지방방송에서 신년 행사 방송을 할때 ''''Пыль снежная''''[* 눈의 먼지]를 공개했다.[youtube(9q2BhOsa4tU)][* 그러나 당시에는 락은 불건전 음악이었기에 방송사의 정식판 비디오는 지워져 버렸고 저질 해적판 VHS비디오가 복사됐다.] 소련 정부에 탄압에 방송사의 음향 엔지니어 안드레이 코마로프는 재녹음을 당국에 요청했으나 거부 당했다. 드러머인 알렉산드르 자루빈과 기타리스트 안드레이 사드노프는 음악의 자유를 제한받자 건축활동으로 전환하기로해 그룹을 탈퇴했다. 1985년 부투소프와 작곡가이자 작사가 '''일리야 코르밀체프 '''가 적극적인 협력 관계가 된다. 1985년 2월은 이들은 아파트의 작은방에서 작곡에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Невидимка''''[* 지금까지도 리메이크 되고있는 '작별의 편지'도 이 앨범에 속해있었다.]라는 새 앨범을 공개하였고 3월 9일 초연 공연이 이루어졌다. 6월1일 스베틀롭스크에서 공연을 했다. 1986년 1월 11일에 러시아의 뮤지션 알렉산드르 판티킨의 생일 콘서트에 참여했다. 이 날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의 색소폰 연주자 알렉세이 모길료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6월22일에는 스베틀롭스크의 록-클럽에서이 공연도중 마지막 곡 '작별의 편지'를 부르고 있을때 관객들이 모두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다른 록그룹의 멤버들도 올라와 다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퍼포먼스가 나중에는 나우틸루스만의 공연 문화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8월 4일 나우틸루스가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한 앨범 ''''Разлука''''[youtube(QlypehHPxCs)][* 이별/발음은 '라줄루까'][* 이때부터 나우틸루스는 검열을 피하기위해 하나의 앨범에 여러가지 장르의 노래들을 담았다.]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스베틀롭스크 지방에서만 인지도가 있었던 나우틸루스를 '러시아록의 전설'로 끌어올려놓았다. 12월 1일에는 부투소프와 우메츠키는 드러머 '''알베르트 포타프킨'''[* 포타프킨은 나우틸루스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영입 요청을 받았지만 둘 다 기회를 저버리기 아까워서 결국 두 록 그룹에 참여했다.]을 영입했다. 1987년은 앨범 '라줄루카'가 전국적으로 흥행하며 여러 지역에서 공연 요청들이 들어왔고 1987년은 나우틸루스가 가장 바빴던 시기이다. [youtube(RoQD0Qi9OZE)]튜멘 공연 [youtube(DmcnNODSl38)]빠돌스크 락페스티벌[* 사실 음반보다는 라이브가 훨 나았다 카더라] 7월 7일 드러머인 알베르트 포타프킨은 소련군에 징병되어 떠났고 한동안 그의 빈자리를 드럼머신이 채웠다. 9월 이후에는 드러머 자리를 블라디미르 나지모프가 대신했다. 10월 10일, 그룹은 최초로 모스크바 고르부노프 문화궁전 , 12월 10일에는 록-프로그램87에서 공연함으로 모스크바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DDT,아크바리움,키노와 같은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룹으로 성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